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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손 잃고 손을 그리는 사람, 발로 손을 그리는 사람...
2018년 02월 20일 23시 46분  조회:6012  추천:0  작성자: 죽림

손을 잃고 손을 그리다

지체장애 1급 김밝은터 씨의 삶 - 1

 

 
에이블뉴스,   2017-12-22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석
한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시는 오세영 시인의 ‘열매’다. 열매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를 비롯하여 우주가 들어 있다. 모나지 않고 둥근 열매 속에는 시련의 늪을 지나온 긴 여정과 인고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열매를 맺기 위해 땅으로 뻗은 뿌리는 날카롭고, 하늘로 향한 가지는 뾰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씨앗이자 결과인 열매는 부드럽고 둥글어 모가 나지 않는다.
 
김밝은터 씨.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 김밝은터 씨. ⓒ이복남
김밝은터(1955년생)의 한자 이름은 김명기(金明基)다. 김명기 씨는 그림을 그리면서 한자이름을 밝은터(明基)라는 우리말로 풀어 쓰고 있다. 

그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이다. 어린 시절은 고성에서 지냈지만 별다른 기억은 없다고 했다. 그는 3남 2녀의 장남인데 고성에 살 때는 혼자였다. 여섯 살 때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대신동에 살았는데 동생들은 부산 와서 태어났다. 

“대신동 산동네에 살았는데 부모님은 고물장사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는 철모르던 시절이라 또래 친구들이랑 뒷산에서 주로 놀았다. 
 
제일 작은 꼬마가 김밝은터. ⓒ김밝은터 갤러리에이블포토로 보기▲ 제일 작은 꼬마가 김밝은터. ⓒ김밝은터 갤러리
집에는 전기도 없어서 호롱불을 켜고 살았는데 뒷산에는 고압선 철탑이 있었다. 7살 되던 해 봄이었다. 하루는 동네 형이랑 뒷산에서 놀았다. 고압선에 연이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형이 가는 철사 줄에 돌멩이를 묶어서 저더러 던지라고 했습니다.” 

고압선은 높지 않았을까? 

“언덕에서 보면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장난삼아 몇 번이나 돌멩이를 던졌는데 그러다가 악! 그대로 언덕 아래로 굴렀다. 놀란 형이 동네사람들을 불러 왔는지 어떤 아저씨의 등에 업혀 산을 내려갔던 것 같다. 정신이 들었을 때 어렴풋이 불꽃이 보였는데 그리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감전에 의한 부상사고는 쇼크와 화상이다. 그는 어린 나이라 너무 놀라서 정신이 없었고 두 팔과 두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있었기에 전기가 땅으로 흐르지는 못했는지 발목 뒷부분의 근육이 전부 파열되었다. 다행히 다리는 자르지 않았지만 화상자국이 선명한 다리 뒤쪽을 그는 바지를 걷어서 필자에게 보여 주었다.

“며칠 만에 깨어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보수동에 있는 영국병원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손을 자르고 그 자리가 썩어 들어가니까 이번에는 팔을 자르고……. 그러면서 병원을 여러 번 옮겨야 했다. 
 
돈 세는 손.  ⓒ김밝은터 갤러리 에이블포토로 보기▲ 돈 세는 손. ⓒ김밝은터 갤러리
“집에는 돈이 없었기에 구호병원이나 자선병원 같은 무료병원에 있었습니다.” 

의사는 최선을 다했겠지만 팔을 너무 자르는 바람에, 어깨에서 10cm도 안 남아 갈고리 의수는 힘이 없단다. 당시 부모님의 고물상은 빈병이나 파지 등으로 형편이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 있었는데 그의 사고로 고물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울었으나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너무 어린 때라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1년 가까이 병원생활을 했다. 그리고 양 팔에 갈고리 의수를 하고 다시 서너 달 동안 다른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했다. 

“의수를 하고 갈고리 집게를 사용하는 방법을 훈련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누가 어떻게 그를 치료했고 누가 그를 도와주었는지 잘 알지도 못했다. 아무튼 그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치료를 했고 경제적 지원도 받으면서 아홉 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장애인이라고 다른 아이들이 놀리지는 않았을까. 

“안 보는데서 놀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는 다른 아이들이 놀린 기억이 없다고 했다. 정말 그랬을까? 그는 또래 아이들 보다 나이도 한 살이 많았고 덩치도 컸다. 그리고 아이들이 갈고리 손을 무서워해서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아마도 아이들은 그가 무서워서 대놓고는 놀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중국집에서 짜장면 먹기.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 중국집에서 짜장면 먹기. ⓒ이복남
필자가 어린 시절 제일 무서웠던 것이 갈고리 손을 휘젓고 다니던 상이군인이었다.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때만 해도 6.25 전쟁에서 다친 상이군인들이 떼를 지어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누군가 ‘상이군인 온다!’ 하고 외치면 아이들은 무서워서 전부 숨었고 상이군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금품을 요구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국가유공자 관련법이 제정되어 더 이상 거리에서 상이군인들을 볼 수 없었다.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공부는 재미없었다. 갈고리 손으로는 책가방을 들 수도 없었기에 아래 여동생이나 친구들이 책가방도 들어 주었다. 갈고리 집게손은 힘이 없어서 연필을 쥘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필기는 어떻게 했을까. 

“집에 와서 발가락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비뚤비뚤 못 쓰는 글씨지만 그 때부터 그의 발은 손이 되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발로 글씨를 쓰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시험 때는 어쩔 수 없이 발가락으로 시험을 쳐야 했다. 어린 마음에서인지 친구들 앞에서 죽기보다 싫고 수치스러웠던 모습이었다. 

체육시간에는 피구나 배구 같은 공놀이를 했는데 그는 운동장 한편에서 아이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구경해야 했다. 그러나 동네에서는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들이고 가난한 동네였기에 제기차기 구슬치기 등을 할 때는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놀았다. 축구는 같이 어울렸고, 야구를 할 때는 공을 던질 수는 없었기에 심판을 보기도 했다.
 
볼타바강 다리에서. ⓒ김밝은터 갤러리 에이블포토로 보기▲ 볼타바강 다리에서. ⓒ김밝은터 갤러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안 갔습니다.” 

공부도 재미가 없었지만 집에 돈도 없었기에 부모님도 그를 억지로 중학교에 보내지는 않았다. 어쩌면 친구들에게 발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장차 무엇이 되려고 학교도 가지 않았을까.

“학교를 다녀봤자 취직도 못 할 건데 공부는 해서 뭐하나 싶었습니다.” 

철이 들면서 몇 번이나 죽고 싶었다. 그러다가 조금 나이가 들자 사람들의 손이 너무 너무 부러웠다.

“첫째는 손이 부러웠고 둘째는 세계여행이었습니다.”

두 손을 가지고 캐리어를 끌고 세계여행을 나서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나는 언제 한 번 저렇게 해 보나!”

그에게는 언제나 동경과 절망이 함께 했다. 두 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외국여행에 대한 동경이었다. 그저 가슴이 내려앉을 뿐이었다. 희망도 없고 앞으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왜 절망이 없었겠습니까? 그래도 모진 목숨이라 죽어지지 않던데요.” 

그는 날마다 절망했고 날마다 좌절하며 죽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절망과 인고의 세월이었고 죽지 못해 사는 목숨이었다. 그 무렵 우연히 한자가 눈에 들어 왔다. 혼자서 천자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늘 天 따 地 검을 玄 누를 黃, 천자문은 선생이 없어도 혼자서 배울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천자문 펜글씨를 연습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


발로 손을 그리는 사람

지체장애 1급 김밝은터 씨의 삶 2

에이블뉴스, 2017-12-26 

그 무렵 그의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좋아서 발가락에 연필을 끼우고 노랫말을 따라 적기 시작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 같은 노래들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했다. 그렇게 노래 가사를 적었지만 그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그 때 노래 가사를 적은 노트가 몇 권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그렇게 지내다보니 노랫말이나 지어 볼까 싶어서, 한 때 작사가나 시인이 되려고 했었다. 그렇다면 시를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모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시를 공부했다.
 
발로 그림을 그리는 김밝은터. ⓒ김밝은터 갤러리에이블포토로 보기▲ 발로 그림을 그리는 김밝은터. ⓒ김밝은터 갤러리
노천명의 ‘사슴’을 좋아했다.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에서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러면서 몇 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아래 시는 그의 시 ‘사진첩’이다.

‘사진첩

추억을 펼쳐본다 
지나간 시간을 붙들고 있는 
조각 조각 조각들 

나는 이렇게도 변치 않고 있는데 
너는 왜 그렇게도 많이 변했느냐고 야단친다. 

맑은 눈망울 부드러운 피부였는데 지금 너의 눈빛은 
욕망이 가득찬 탁한 눈빛이고 거친 피부는 모진 풍파에 
많이 시달렸음을 알 수 있구나 

다른 조각을 펼쳐본다 
나는 이렇게 소박하고 검소한데 너는 왜 그렇게 사치스럽고 
뻔뻔해졌냐고 힐책 하네 

또 다른 조각을 펼쳐본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하고 희망찼는데 
너는 왜 그렇게 게으르고 의욕이 없냐고 한심스러워한다. 

조각 조각 조각들…….’

당시만 해도 나이 스물에 뭐라도 해야겠는데 시를 쓴다는 것은 돈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뭘 해 볼까 고민했다. 그가 해볼 만한 것은 웅변, 서예, 그림 등인데 모두가 학원에 다녀야 했다. 사실 돈이 들어가는 일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기초만 서너 달 배워 집에서 혼자 하면 되겠지 싶어 물색 하던 중 초상화 화실을 발견했다. 선생은 그를 보더니 난감해 했다. 그 때가 여름이었는데 너무 더워 땀이 비 오듯 했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우고 초상화를 그리는 모습을 선생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생은 그런 저를 보더니 차라리 그림을 그려보라면서 화실 하나를 소개해 줍디다.” 

그렇게 해서 만난 선생이 김용달 화백인데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용달 선생도 처음에는 황당해 하시더니 그림을 어떻게 그리느냐고 물었다. 

“발로 그립니다.” 

선생님은 조그마한 반마스크 하나를 주시면서 집에서 데생을 해 오라고 했다. 데생을 해서 선생님에게 가져가니 잘 했다면서 또 다른 숙제를 주셨다. 
 
스승과 제자. ⓒ김밝은터 갤러리에이블포토로 보기▲ 스승과 제자. ⓒ김밝은터 갤러리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당시만 해도 미대 준비를 하는 아이들은 그런대로 살만한 집 아이들이고, 미술학원은 회비도 제법 비쌌다. 나름대로 기초 서너 달은 배울 예정이었으므로 한 달이 지나 선생님에게 회비를 드렸다. ‘니 한테는 안 받을 테니 회비 걱정하지 말고 나오너라.’

“선생님은 제 사정을 어찌 아시고 회비도 안 받겠다고 하시는지 목이 메었습니다.” 

그래도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얼마 후에는 조그만 화분을 하나 사들고 갔는데 다음부터는 그런 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선생님은 그림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제게 소질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연습이었다. 하루 종일 발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팠다. 붓을 잡고 용을 쓰다 보니 어떤 때는 발가락에 쥐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는 혼자서 그리지만 큰 그림은 좀 높은 곳에 앉아서 그려야 되므로 의자나 탁자 등을 올려 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요즘은 활동보조인이라는 제도가 있어 저도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신청을 해 봤는데 하루에 몇 시간은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활동보조인도 포기를 하고 필요한 것은 동생들이 도와준단다. 

처음 김용달 선생님에게 기초를 배우고 혼자서 피나게 노력했었다. 그 때가 1975년이었다. 

“김용달 선생님과 그렇게 만났는데 벌써 40년이 되어 2015년에는 스승과 제자전을 부산에서도 하고 국회의사당에서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김밝은터·김용달 2인전도 했다. 처음에는 그는 화실에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집에서만 그렸다. 발로 그림 그리는 모습을 다른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이 그에게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하자, 하루는 한 학생이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을 해야 된다면서 그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는 싫다고 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네 솜씨를 못 믿겠으니 자기가 보는 앞에서 직접 그려 보라며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그날 처음으로 그 학생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친구는 감탄했고, 그 후부터 그 친구하고는 오랫동안 잘 지냈다. 그 친구는 홍익대를 갔는데 언제부터인가 소식이 끊어졌단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학교 다닐 때도 무거운 가방은 들기 어려우므로 친구들이 들어 줬다. 화실에서도 가벼운 종이나 붓 등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가 있었으나 무거운 캔버스나 이젤, 화구통 등은 누군가가 들어 주어야 했던 것이다.
 
스승과 제자전 방송. ⓒ김밝은터 갤러리에이블포토로 보기▲ 스승과 제자전 방송. ⓒ김밝은터 갤러리
김용달 선생님은 교사였는데 교사 과외금지령이 내렸다. 

“선생님의 화실에서 사모님이 어린이 미술교실을 운영했습니다.”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사모님도 그에게 이것저것 챙겨 주셨는데 아이들이 돌아 간 밤에는 미술학원은 온전히 그의 차지였다. 

“아이들이 소풍이라도 갔다 오는 날이면 사모님이 챙겨주시는 간식거리가 산더미 같았습니다.” 

선생님과 사모님 덕분에 그는 무료로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그림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가난했다. 아래로 동생들이 태어났고 부모님은 조그만 빵가게를 운영했지만 그가 돈을 번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성당은 언제부터 다녔을까. 

“병원에서 성당가자는 사람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다녔습니다.”

일요일이면 성당에 가고 밤이면 선생님의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바람과 그리움 그리고 동경의 대상은 손과 세계여행이었다. 

그는 주로 창조적인 추상화를 그렸는데 그에게는 까마득한 꿈에 불과했기에 어느 날 부터인가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손은 유능한 도구이고 아름다움의 표상이다. 그러므로 나뭇가지, 나뭇잎, 꽃, 과일, 덩굴손 등의 초목들도 동경했다. 

그러나 동경하는 것들은 이들만은 아니었다. 언제나 손을 갈망했다. 유능하고 아름다운 그 도구를 다시 갖고 싶어 함은 잃어보지 않은 자는 잘 모를 것이다. 
 
김밝은터의 꿈꾸는 나무. ⓒ김밝은터 갤러리   에이블포토로 보기▲ 김밝은터의 꿈꾸는 나무. ⓒ김밝은터 갤러리
그가 꿈꾸는 나무, 그것은 손이었다. 그의 화폭에는 손과 팔을 닮은 꿈의 형상들이 애절하고 그리고 처절하게 펼쳐졌다. 

“처음에는 손을 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잃어버린 손에 대한 기피이자 외면일지도 모른다. 1980년대 우연히 손을 찍은 사진을 보았는데 그때 처음으로 손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름다운 손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진리를 모두 가지고 있는데 언제까지 부러워만 하고 있을 건가 싶었다.

“손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름도 明基(명기)를 한글로 '밝은터'라고 풀었더니 사람들이 훨씬 잘 기억하더군요.”

정말 연애는 한 번도 안 해 봤을까? 

“20대에는 생각도 못해 봤는데 30대부터 형편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취직이나 아니면 그림을 팔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우연히 구족화가협회에 가입했더니 장학금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구족화가란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입(口)이나 발(足)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말한다. 
 
빈 세계구족화가협회에서. ⓒ한국구족화가협회에이블포토로 보기▲ 빈 세계구족화가협회에서. ⓒ한국구족화가협회
독일인 에릭 스테그만은 소아마비로 팔을 쓰지 못하던 구족화가였다. 그는 장애로 인해 화가로서의 재능이나 실력이 있음에도 생계를 꾸리기도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들을 적선이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런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스테그만은 1950년대에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들과 힘을 모으기로 했다. 

그리고 1956년 중부유럽 구족화가들을 모아 구족화가협회(AMFPA)를 설립했다. 본부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국경지대에 위치한 리히텐슈타인공화국에 두었다. 이를 토대로 현재는 전세계 70개 국, 700여 명의 재능 있는 구족화가들이 활동하는 국제적인 모임으로 성장했다. 

한국에서는 1985년 구필화가 김준호 씨가 처음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활발한 작품 활동에 감명 받은 구족화가들이 하나둘 동참하기 시작했고 그 수가 7~8명으로 늘어나면서 1992년 1월 한국지부가 설립됐다.

현재 한국에서는 구필화가 14명과 족필화가 8명, 도합 22명이 국내에서 활동 중이란다. -한국구족화가협회에서 발췌-

“돈이 생기니까 내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구족화가협회에서 나오는 장학금은 그가 그림을 그리고 먹고 살만큼은 된다고 했다. 그 때부터 주로 손과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른 바 꿈꾸는 나무였다. 그리고 먹고 살만해지자 결혼해서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제가 좋아하는 여자는 제게 별로 관심이 없고, 다가오는 여자들은 제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먹고 살만해 지니까 눈이 높아진 것 같다고 했다. 여자 다음으로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대학생이었다. 예전에는 대학생이 부럽기만 한 존재였는데 그에게도 약간의 여유가 생기니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기에는 많은 세월이 흘렀다. 

“중입 검정고시를 치고, 고입을 치고 대학생이 되는데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살다보니 일본 사람들을 자주 만날 기회가 있어서 방송통신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일어를 배우려고 입학했는데 일어보다는 문법이나 역사 등 다른 데 시간을 다 뺏기는 것 같아서 대학은 아직도 졸업을 못했단다.
 
김명기 후원자. ⓒ플랜코리아에이블포토로 보기▲ 김명기 후원자. ⓒ플랜코리아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플랜코리아(PlanKorea)에 대해서 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무심코 쳐다보다가 양친회라는 말에 그야말로 귀가 번쩍 띄었다. 아! 양친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양친회가 뭘까? 

“어릴 때 저를 후원해 주던 데가 양친회라고 했습니다.” 

양친회란 플랜코리아의 한국이름이다. 플랜은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존 랭던 데이비스(John Langdon-Davies)와 그의 친구 에릭 머거리지(Eric Muggeridge)에 의해 1937년에 설립되었다. 

스페인 내전의 종군기자로 참여하였던 존은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돕기 위해 '포스트 페어런츠 플랜(Foster Parents Plan)'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당시 플랜의 활동목표는 스페인 내전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에게 음식과 쉴 곳, 그리고 교육을 지원해 주는 국제구호개발 NGO 단체였다.

플랜코리아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1979년까지 양친회(養親會)라는 이름으로 활동 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 속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해 플랜은 전세계 후원국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각국에서 전달된 후원금으로 매년 2만 5천여 명의 한국 어린이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플랜코리아에서 발췌-

그는 1964년부터 양친회를 통해 스웨덴의 양부모로부터 후원을 받았었다. 그러나 잊고 있었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우연히 플랜을 알게 되어 동남아 지역 어린이를 위해서 약간의 후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스웨덴의 양부모님이 보내준 엽서를 보면서 외국여행의 꿈을 키웠어요. 꿈이라기보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동경이었죠.”

엽서에 있는 이국적인 모습들을 보면서 저기 한 번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살기도 힘든데 언감생심 외국은 그야말로 꿈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전시회를 하게 되었다. 단독으로 하는 전시회는 물론이고 그의 그림을 한 점 또는 두 점을 출품하는 전시회도 가지게 되었다.<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


꿈꾸는 나무의 노래

지체장애 1급 김밝은터 씨의 삶 - 3

에이블뉴스, 2017-12-29 

그러는 가운데 그에게는 두 손이 생기는 것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던 세계여행의 기회가 왔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1997년 세계구족화가협회 초대로 스위스 등 유럽여행을 하게 되었다. 

“처음 해외여행을 했을 때는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구족화가협회에 들렀다가 유럽 배낭여행을 했는데 그 때만 해도 영어라고는 예스, 오케이 밖에 몰랐다. 그래서 처음 여행에서 돌아 온 후 남동생하고 어학연수 겸 캐나다로 9개월간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다. 
 
장가계에서. ⓒ김밝은터 갤러리 1에이블포토로 보기▲ 장가계에서. ⓒ김밝은터 갤러리 1
그리고 2004년 북경을 거쳐 장가계로 여행을 했다. 

“‘사람이 태어나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있다던데 중국어는 잘 모릅니다.” 

‘人生不到張家界, 白歲豈能稱老翁’(인생부도장가계, 백세개능칭노옹) 이 말은 장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이야기하는 중국인들의 표현이란다.

장가계는 오랜 세월 동안의 침식작용 등 자연적인 영향으로 오늘과 같은 깊은 협곡과 기이한 봉우리로 남게 되어, 물 맑은 계곡이 어우러지는 자연 절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상의 건축물 중 달에서도 유일하게 볼 수 있다는 만리장성도 돌아보았다. 
 
중국의 칸막이 없는 공중화장실. ⓒ김밝은터 갤러리  에이블포토로 보기▲ 중국의 칸막이 없는 공중화장실. ⓒ김밝은터 갤러리
김밝은터의 갤러리를 둘러보니 중국에서 찍은 칸막이 없는 화장실이 있었다. 그런 화장실은 다른 곳에서도 가끔 보았었다. 문제는 김밝은터 씨가 갈고리 의수는 힘이 없다고 했는데, 필자가 조심스레 물어 본 것은 예전에는 비데도 없었는데 화장실은 어떻게 했을까? 

“화장실에 비데를 놓은 것도 얼마 안 됩니다. 어렸을 때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달았습니다.” 

아, 그런데 밥은 어떻게 먹을까? 

“젓가락은 못 쓰고, 숟가락이나 포크는 들 수 있습니다. 그릇을 앞에 놔 주면 먹을 수 있습니다.” 

마침 필자의 이웃 사무실에서 과일을 한 접시를 깎아 왔다. 

“접시를 앞에 놔 주고, 포크만 있으면 됩니다.” 

그는 필자에게 과일을 먹어 보였다.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필자는 실례가 될까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괜찮습니다. 이제는 부끄러울 것도 없습니다.” 

과일 먹는 모습을 찍어도 된다고 했다. 
 
과일 먹는 모습.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 과일 먹는 모습. ⓒ이복남
2007년 세계구족화가협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구족화가 아홉 명이 오스트리아로 출국했다.

“저는 남동생하고 조카랑 같이 갔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대행사 일정을 마치고 동생과 조카와 배낭 여행길에 올랐다. 체코 프라하를 거처 독일 베를린을 지나 영국 런던으로 갔다. 휴식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는 트라팔카 광장 중앙에는 분수대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뿜어 올랐고 살아있는 비너스로 불리는 하얀 대리석상의 구필화가 엘리슨 쿠퍼(Lapper Alison)의 좌상도 있다. 

“나라를 빛낸 장군도 정치가도 아닌데 양팔도 없고 양다리도 온전하지 않는 장애인을 만인에게 자랑스럽게 석상을 만들어 세워놓은 영국인의 의식은 역시 선진국인 것 같았습니다.” 

런던 대영박물관은 입장료도 받지 않았고 이집트, 그리스, 로마, 아프리카, 이슬람 그리고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등의 유물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한국실에는 김홍도의 화집, 공예품, 등과 백남준의 그림, 월전 장우성의 그림도 있었다.
 
파리 몽마르트 언덕, 제일 아래 회색잠바. ⓒ김밝은터 갤러리에이블포토로 보기▲ 파리 몽마르트 언덕, 제일 아래 회색잠바. ⓒ김밝은터 갤러리
파리에서는 세느강과 에펠탑을 둘러보고 몽마르트언덕에서 파리 시가지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유럽 여행을 하는 동안 여러 나라의 문물을 접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어린 조카와 같이 동행하다보니 여성들이 경계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이 배낭여행의 어려움이자 묘미가 아닐까 싶었다.

그는 세계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의 일상이란 그림 그리는 일이다. 다행히 은사인 김용달 선생님 덕분에 그림을 계속 할 수는 있었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첫째는 남들이 손으로 그리는 것을 저는 발로 그려야 한다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가 그릴 그림 앞에 오른발이 있어야 되는데 오른발은 어느 정도 높이에 있어야 된단다. 그의 그림은 언제부터 그가 꿈꾸는 손을 그리고 있는데 그의 그림은 추상화이므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고민해야 하므로 골치가 아프단다. 그리고 그의 그림이 처음부터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꿈꾸는 김밝은터 미술관. ⓒ김밝은터 갤러리 에이블포토로 보기▲ 그가 꿈꾸는 김밝은터 미술관. ⓒ김밝은터 갤러리
“처음에는 돈도 없었지만 부산 미술대전에도 여덟 번 만에 입선했습니다.” 

그 후 약간의 돈은 구족화가협회에서 장학금으로 지원을 받았지만 미술에 대한 것은 그야말로 7전8기였다.

“누구는 33살까지만 살겠다고 했다지만 저는 그 때 15년만 더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몇 배로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지금도 꿈에서는 가끔 손을 봅니다.”

손은 그의 꿈이자 동경이었고, 다시는 가질 수 없는 손이기에 손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손은 그의 꿈이었기에 꿈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손이라면 독일 화가 뒤러의 ‘기도하는 손’이 많이 알려져 있다. 

뒤러의 ‘기도하는 손’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젊은 시절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그의 친구는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다. 뒤러와 친구는 의기투합하여 도시로 공부를 하러 떠났는데 돈이 없었다. 친구는 뒤러에게 내가 돈을 벌 테니 네가 먼저 그림공부를 하라고 했다. 그동안 친구는 뒤러의 학비를 벌기위해 노동을 했다. 뒤러는 친구의 도움으로 그림을 공부하여 제법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뒤러의 기도하는 손. ⓒ구글 이미지 에이블포토로 보기▲ 뒤러의 기도하는 손. ⓒ구글 이미지
그러던 어느 날 뒤러는 이제는 친구가 공부할 차례라고 생각해서 친구를 찾아 갔다. 그런데 창밖에서 바라 본 친구는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 기도는 뒤러를 위한 것이었다. 

“주여! 저의 손은 심한 노동으로 이미 다 망가지고 굳어서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 몫까지 뒤러가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소서!”

뒤러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 자리에서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했다. 뒤러의 ‘기도하는 손’은 그렇게 탄생한 친구의 손이라고 한다.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알브레히트 뒤러는 1471년 독일 남부 뉘른베르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공한 세공사였고 뒤러의 대부는 안톤 코버거라는 갑부였다. 뒤러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가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손’은 1508년 뒤러가 그린 드로잉인데 당시 뒤러는 여러 가지 손 모양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기도하는 손’에 관한 이야기는 누군가가 지어낸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 일 뿐이라고 한다.

“제 그림을 보시면 알겠지만 제 그림은 뒤러의 ‘기도하는 손’ 같은 사실화가 아니라 ‘꿈꾸는 나무’라는 추상화입니다.” 

그는 손을 잃고 나서부터 손과 팔은 그의 좌절이자 이룰 수 없는 꿈이고 동경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제게도 팔이 있고 손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는 두 손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두 손이 있었다면 오늘 날과 같은 화가 김밝은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제9회 오늘의 작가상. ⓒ김밝은터 갤러리에이블포토로 보기▲ 제9회 오늘의 작가상. ⓒ김밝은터 갤러리
그렇게 손을 많이 그리다보니 미술을 아는 사람들은 손 그림 하면 ‘김밝은터’라고 말할 지경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런 손이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2010년 1월 25일 부산미술협회 제68차 정기총회에서 제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자로 선정 된 것이다. 

그동안 많은 대회에 나가서 입선을 했고, 은사인 김용달 선생과 ‘스승과 제자전’도 했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는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지만 그에게 손은 좌절이자 꿈이다.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손이 등장한다. 자연이 손으로 형상화되었다가, 훗날 그가 지을 미술관이 되기도 한다. 미술관을 지어 사회에 환원하는 게 그의 또 다른 꿈이란다.

“아직은 꿈이겠지만 줄기세포전도 그런 의미를 담아서 그려 보았습니다.” 

줄기세포가 활성화 되면 그도 다시 손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손에 대한 꿈을 차마 지우지 못해 장애의 슬픔을 해소시킬 수 있도록 줄기세포의 연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줄기세포와 관련된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잠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여 안타까운 날들을 보내는 줄기세포여, 너는 왜 깨어나지 못 하는가, 깨어나라, 뻗어라, 자라라, 잠에 취한 유능한 줄기세포여!” 

깨어나지 못하고 멈추어 있는 것은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란다. 꿈을 꾸고 희망을 가져라 줄기세포여! 줄기세포는 언제쯤 그의 팔이 되고 손이 될 수 있을까. 
 
꿈꾸는 줄기세포展. ⓒ김밝은터 갤러리  에이블포토로 보기▲ 꿈꾸는 줄기세포展. ⓒ김밝은터 갤러리
“내 그림이 많은 사람들의 눈 속에 새겨지면 나는 슬픔에서 벗어나리라” 

그는 그의 아픔을 주제로 그의 한을 발산하는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렇지만 한을 풀기 위해 손을 그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의 생활은 많이 불편하다. 그 불편을 감추려고 한을 눌렀지만 그 한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드러내 발산하는 것이 솔직한 것 같았다. 그래서 요즘은 그 한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단다.

“이제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기에 오라는 데만 있으면 강의도 다닙니다.” 

얼마 전,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으로 학생들에게 그림을 보여 주면서 강의를 했단다. 그림이 무거울 텐데 어떻게 들고 갔을까. 그는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칩 하나를 꺼내 보였다. 

“요즘은 그림을 안 들고 다녀도 되던데요?”

파워포인트로 만들어서 가면 된다고 했다.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어쩌다 보니 가톨릭신자가 되었는데, 성모병원이 개원할 때 작품 한 점을 기증했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필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다음날 혼자 성모병원을 찾았다. 병원 카운터에 물어보니 다들 모른다고 했는데 마침 한 사람이 기획실에 물어 보더니 4층 베네딕도 강당 안에 있다고 했다. 
 
필자가 성모병원에서 찍은 선과 악.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 필자가 성모병원에서 찍은 선과 악. ⓒ이복남
한은 한을 가진 자만이 한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다른 사람들이 한을 가지지 않도록 한의 비애를 각인시키기 위한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단다. 사람들은 그의 꿈꾸는 나무에서 무엇을 볼 수 있으며 무슨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발로 그리다보니 허리도 아프고 발가락도 아프다.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붓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림을 그리면 행복할까. 

“행복이요? 그런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추상화를 그리다보니 끊임없이 생각하고 창작해야 되므로 오히려 골치가 아픕니다.” 

그동안 세상을 참 많이 원망했다. 그러나 이제는 담담하단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림에 몰두하기 때문에 이제는 원망도 안하지만 고통도 원망도 다 잊어버립니다.” 

그림은 어쩌면 그의 삶이자 희망이며 구원일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직분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학생은 공부를 하고,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를 치고, 저는 그림을 그리는 것 말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손을 가진 사람들은 손을 좀 올바르게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고 그의 꿈을 위해서 그의 꿈들이 그의 작품이 된다고 했다. 그는 꿈속에서도 손을 찾고 있다고 했다. 프로이트는 “꿈이란 어렸을 때 좌절된 무의식적 욕망의 표현”이라고 했다. 그도 무의식에서는 손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꿈속여행에서는 그가 정말로 손을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손이 그를 잃어버린 것인지 또 다시 몽롱해진단다. 장자의 나비처럼.

현재 그는 세계구족화가협회, 부산미술협회. 부산창작미술협회, 부산사하미술인회, 부산환경문화연합, (사)한국전업미술가협회 부산지회, 부산가톨릭미술인회, 한국미술협회 등의 회원이다. <끝>

* 이복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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